DMZ 탄생

DMZ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 비운의 첫 선(線) - 북위 38°선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드디어 일본의 치욕스러운 어둠을 벗고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결과,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에 의해 세계질서가 맡겨졌고, 이로 인해 한반도의 독립은 결코 한국의 몫이 아닌 강대국의 결정 -적절한 시기, 또는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을 독립시키겠다는 한마디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운명은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회담 때부터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다. 얄타회담으로 마련된 양대 세력권의 틀(얄타체제), 즉 미국, 소련에 의한 세계질서의 기본구조는 2차 세계대전 후 한반도를 미소/영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하에 두는 것에 합의하였다. 이는 우리가 고대하던 독립과는 무관하게 얄타체제의 그늘아래 놓일 문명을 예고한 것이었다. 두 차례의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은 1945년 8월 10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내용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고 통보하였고, 이에 미국의 전쟁성 작전국 전략정책단에서는 일본군의 항복조건들이 담긴 항복문서인 '일반명령 제1호'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 문서에는 '한반도의 어느 선을 구획하며 미국과 소련이 각각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느냐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 있었고, 이를 전략정책단 정책과장인 본스틸 (Charles H. Bonesteal) 대령이 한반도 지도를 보고 판단하며 북위 38선을 따라 분할하는 것으로 작성하였다. 이는 30분만에 작성된 것으로 3천만명의 단일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계기가 되었다.

30분만에 그어진 38선 분단지도

전쟁당시 38선 푯말

이에 대한 문서는 미국대통령 승인하에 소련에게 제안되고, 소련의 스탈린은 8월 16일에 이 제안에 동의함으로써 북위 38선은 그어지게 되었다. 이는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이후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 전쟁과 가슴 아픈 분단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비운의 첫 선(線)으로 기록되었다.

2 비운의 시작 - 또 하나의 계기

서울 종로의 한 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살아가는 첫째, 힘든 생활 속에도 약혼녀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생의 대학 진학을 위해 언제나 종로를 뛰어다니며 밝은 생활을 해나간다. 이 이야기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회상 첫 부분이다. 한 가족을 책임지며, 힘겹게 살아가는 민중 이야기의 한 조각으로 당시 삶을 대변해 주고 있으며 그 누구도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알지도 장담하지도 못한 폭풍전야의 평화를 보여주고 있는 장면인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10개 사단 병력의 북한군에게 공격개시를 뜻하는 암호명령인 '폭풍이 떨어졌다. 이로써 비운의 첫 선인 38선이 무너지며, 황해도를 비롯하여 개성과 춘천 그리고 동해안 지역은 순식간에 싸이렌 소리와 폭발음.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해진다. 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잉태하는 소리이며, 3년 1개월간의 승자없는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후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한강방어선이 마저 무너져 내렸다. 9월 중순까지 처절한 사투는 계속되었으며, 부산을 기점으로 남북 135km, 동서 90km의 낙동강방어선은 최후의 방어선으로 구축되었고, 방어선 '낙동강교두보'라 불리는 조그마한 땅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크로마이트 100B 계획, 흔히 말하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고 9월 28일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북한군에 의해 함락된 지 3달만의 일이었다. 전쟁 중인 50년 10월 한달은 국민들이나 군인에게는 가장 고무적이고 흥분된 기간이었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휘하 장병들에게 “크리스마스는 고국에 돌아가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을 정도로 유엔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북한지역으로 진격하고 있었고, 앞으로 2개월 정도면 북한지역을 완전 점령,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하는 그 순간 전쟁을 주도하고 있던 미국은 진퇴양난의 고민과 주저 속에 빠져있었다. 38선 이북으로의 작전 확대가 중공이나 소련의 개입을 유도할 것이며 그러할 경우, 전쟁은 한반도의 국지전에서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논리와 더불어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에 이르는 전선이 한반도 중 가장 협소한 지형이어서 조금만 더 북상하면 전선은 1백마일이 더 들게 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면 전선은 4배로 늘어나 중공과 소련의 압력을 계속 지탱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은 소련이나 중공이 개입할 경우 지상군 작전을 38선 이북까지 연장하지 않도록 결정하였고, 이 결정으로 인하여 전의 조짐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협상에 관한 최초의 구체적인 움직임은 중공개입으로 전선에 불안이 가중된 1950년 12월 4일 워싱턴에서 나타났다. 영국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는 “한국전쟁이 대중공전으로 확대, 세계 대전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는 의회의 건의를 미국에 전달하기 위해 이날 워싱턴에 도착, 트루먼과의 회담을 통해 애틀리는 조심스럽게 한국전쟁의 협상, 즉 휴전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사흘간의 회담을 마친 트루먼과 애틀리는 한국전쟁의 휴전을 제의하는 최초의 제스처를 공동성명을 통해 발표했다. 이후 유엔에서는 아랍권의 13개국이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들고 나왔다. 세계의 여론은 휴전이 성립되어야 한다는데 강력히 동조하고 있었고, 유엔 총회에서는 1951년 1월 14일에 이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나 이에 대한 중공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였다. 전황이 중공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시점에서 혹 언젠가 협상에 임해야 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다 하더라도 중공이 여기에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낼 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엔군의 일본 철수론까지 대두케 했던 중공군의 공세는 1951년 1월 중순부터 연합군에 의해 저지되었고 중공군의 인해는 유엔군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인하며 전선은 38선 근처를 오르내리게 되었다. 3월에 접어들면서 전세가 눈에 띄게 호전되자 워싱턴에서는 중공군을 곧 38선 이북으로 밀어낼 수 있고, 중공군 역시 막심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휴전의 계기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 1주년을 2일 앞둔 1951년 6월 23일, 소련 부외상겸 유엔대표인 야콥.A.말리크는 미국 CBS의 유엔 라디오프로에서 "한국에서의 무장충돌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진정 한국에서의 유혈 전쟁을 끝내고 싶은 용의가 있다면 첫 단계로 정전을 위해 교전 국간에 회담을 갖고 38선에서 쌍방의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 라고 제안하면서 휴전협상의 신호를 알렸다.

〈그림 1-〉 1951년 7월 1일 ~ 10월 31일까지 전선

3 휴전의 움직임. 그리고 드러나는 비무장지대 윤곽

1951년 7월 10일, 세계의 이목은 휴전회담 첫 본회의가 열리는 개성에 집중되었고, 각국의 매스컴은 오래지 않아 한국전쟁이 종결되리라는 기사를 대서특필하였으며, 대부분이 전쟁은 늦어도 한달 이내에 끝나리라고 예측하는 등 지극히 낙관적이었다. 그러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기만술책을 겪어 알고 있는 한국의 당국자들과 국민들만이 이와 같은 낙관이 성급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제 1차 회의에서 군사적인 문제에 국한시키자는 유엔측의 제안에 반해 남일은 외군 철수 등 정치적인 문제와 군사분계선을 38선으로 하자는 등 유엔 촉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4개항의 의제를 내놓는 등, 결국 3시간 30분의 휴회를 포함하며 6시간 이상 소요된 제1차 회의는 아무런 소득없이 끝나고 말았으나, 유일한 타협은 개성을 통과하는 주변 일대의 소위 중립지대내에서는 전투를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1951년 7월 15일, 유엔군은 38선에서 최고 30km 북쪽지점에 걸친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공산측은 서부전선에서 38선 이남 근처를 차지하고 있었던 시점에서 열린 제3차 본희의에서 유엔 측은 현재의 전선에 따라서 완충지대를 설치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공산측은 38선을 중심으로 하며 더비 14마일 (22, 5km)의 완충지대를 설치하자고 주장하는 등 양측의 협의점을 찾지 못한 채 회의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래 최초의 진전은 무려 12일이 지난 7월 22일에야 나타났다. 공산측은 이날의 제9차 회의에서 외군 철수안을 철회하였으며, 38선 문제에 관해서 그다지 언급하지 않고 "한국의 모 지점에 정전의 경계선을 설치한다. "는 유엔측의 제만을 의제로 할 뜻을 비쳤고, 양측은 7월 26일 제10차 회의에서 1회의 사항의 채택, 2양군간의 완충지대 설치. 3전투정지와 휴전상태를 감시하기 위한 명확한 기구설치, 전쟁 포로교환에 대한 제반 조치, 5쌍방의 관계국 정부에 대한 제반 권고 등 5개항의 의제에 대해 합의를 하였다.

이 후 휴전회담은 아무런 성과 없이 시간만 빼앗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7월 31일,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휴전회담 개막이래 가장 극적이고, 강렬한 비무장지대 설치 문제의 배경'이라는 특별 성명을 발표하였다. 내용인즉 “... 유엔군은 영토적인 야심을 갖고 있지 않다. 유엔군은 공정하고도 영속적인 평화를 희망하고 있으나 이 때문에 군사적인 잇점의 일부를 포기할 수는 없다. 유엔군의 공군과 해군의 작전 영역은 한국 전반에 걸쳐 있고 지상군은 중요한 전략적인 거점을 확보하고 있다. 휴전협정에 도달하지 않으면 만 될 군사경계선은 지상군과 공, 해군의 전선을 고려할 때 압록강과 개성, 평강 지구를 연결하는 지상군 전선 사이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로 종전의 타협적인 태도를 뒤바꿨다.

유엔 측의 이같은 자세 전환을 가져온 요인은 두말할 것 없이 공산측의 거듭되는 무리한 요구와 한국 정부의 강력한 반발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후 8월 1일. 유엔측 대표인 조미제독은 현접촉선을 기점으로 북방 20마일 폭을 비무장지대로 설치할 것을 공식적으로 공산측에 제안하고 이를 명시한 지도를 건네주었다.

현전선과 압록강, 두만강의 한만 중간지대에서 군사분계선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유엔측의 주장이 개성의 협상테이블에서 공식으로 공산측에 전달되자 조미제독과 남일의 설전은 불꽃이 튀기게 됐다. 뒤늦게 현전선 북방의 어느 지점을 군사분계선으로 주장하는 유엔측의 새로운 제만은 어차피 공산측의 역설을 상쇄시키려는 전략적인 것이었다. 설전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유엔 측 대표인 호지스 소장은 제4차 분과위원회가 열린 8월 20일 현지상군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을 하고 분계선을 중심으로 폭 4km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유엔이 당초의 입장으로 돌아 왔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공산의 38선만을 상쇄시키기 위한 “현전선 북방의 어느 곳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는 조이 제독의 주장을 철회한 것이었다. 유엔 측의 이같은 양보는 공산측도 이에 상응하는 양보를 의당 해볼 것을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공산 대표인 이상조는 수락도 거부도 하지 않는 애매한 태도를 보며 회담은 점점 지루해지고 아무런 성과도 없이 시간만 흐를 뿐이었다.

이후 63일 간의 중단 끝에 회담은 10월 25일 장소를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옮겨 이루어지게 되는데, 회담이 재개되자 논쟁의 초점은 회담결렬 전과 마찬가지로 '제2항(군사분계선)에 맞춰졌다. 제 27차 본회의에 이어 분과위원회가 열리고 서로의 입씨름 끝에 공산측은 마침내 유엔 측이 '현전선안에 접근하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공산측의 이 제안은 껍질만 유엔촉만과 비슷했을 뿐 알맹이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즉 그들이 표시한 현전선은 곳곳에서 유엔측의 지도와 차이가 났다. 유엔측의 지도에 그려진 선은 예성강으로부터 개성 북방 6km 지점을 거쳐 철의 삼각지를 지나 동해안의 고성 남방 18km 지점으로 빠지고 있었다. 여기서 당연히 등장한 이슈는 ‘개성 '이었다.

11월에 접어들면서 판문점 회담의 진전을 가로막은 장벽은 개성문제 였다. 유엔 측은 개성을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비무장지대에 포함시켜 서부전선의 이 요충지를 적이 활용할 수 없도록 하고자 때늦게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유엔 측은 적에게 개성을 포기할 경우 그 댓가로 38선 북방의 모든 섬들을 포기하고 중부전선의 금성고지와 동해안의 고성을 내놓겠다고 흥정했고 독일의 베를린처럼 경계선 너머에 개성을 중립지역으로 설정해 둘 것도 검토하겠다고 해보았으나 공산측이 이미 삼켜버린 땅을 내놓을리 없었다. 개성은 이미 중립지대로 선포되어 무력으로서도 공격할 수 없는 성역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유엔 측이 개성에 대한 요구를 굽히지 않는 한 회담의 진전은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유엔 측은 11월 10일 열린 제23차 분과위원회에서 사실상 개성을 포기하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를 휴전협정을 서명하는 시점의 접촉선을 기초로 하여 지정하자는 것이었다.

유엔 측은 이 제안이 있은지 1주일 만에 미를 더욱 구체화한 극적인 타협안을 제시했다. 1전투는 완전한 휴전이 서명될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현 전선은 잠정적 경계선과 잠정적 비무장지대의 기초가 될 것이다.

이 잠정적 경계선과 잠정적 비무장지대는 새로운 제안이 채택된 후 30일 이내에 완전히 휴전에 합의를 보는 경우에는 최종만이 될 것이다. 만약 30일 이내에 휴전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그 당시의 전선에 의거하여 또다시 잠정적 경계선이 설정될 것이며 상호합의에 의해 발효될 것이다. 11월 17일, 제30차 분과위원회에서 제안된 이 만은 암담해 보이던 회담의 앞길에 청신호 처럼 획기적인 것이었다. 유엔 측의 여러 가지 제안에 한결같이 완강하게 반대의사를 표해오던 공산측은 이 제안이 있자 귀를 의심하는 듯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당장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마침내 공산측 대표인 이상조는 11월 21일 이 제안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해?공군의 작전영역까지를 군사적 현실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유엔촉이 군사분계선의 범위를 지상군의 접촉선으로 결정한데, 이어 개성까지를 포기하는 등 양보를 거듭한 결과 '제2항(군사분계선)의 논의는 수월하게 진전되었고 11월 23일 제35차 분과위원회에서 양측은 제2항을 매듭짓는 '1실제적인 양군의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으로 될 것이고, 분계선이 확정될 때 양측은 이 선으로부터 2km씩 철수한다. 2분과위원회는 즉시 접촉선을 결정하며 양측 대표가 이 합의 사항에 동의한 후 30일 이내에 휴전협정이 조인될 경우 이 30일 동만에 전선의 변화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 선은 변동하지 않는다.'는 2개항에 합의하였다. 미 합의에 의해 다음날인 24일부터 26일 끝까지 남은 7개 미합의 지점은 유엔 측이 5곳, 공산측이 2곳을 양보함으로써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를 가르는 분계선 지도가 작성됐고 양측은 1장씩 이 지도를 나눠가짐으로써 접촉선의 표시에 완전히 합의하였다.

양측 수석대표인 조미와 남일은 제28차 본회의에서 의제 제2항에 정식으로 서명을 함으로써 1951년 7월 26일부터 11월 27일까지 4개월에 걸쳐 65차례의 지루하고도 험악한 분위기의 회의 끝에 의제 제2항 군사분계선'은 타결을 보았으며, 11월 27일부터 12월 27일까지 '30일간의 시한부 휴전이 시작되었다. 군사분계선이 확정되는 순간 이 선으로부터 남북 4km에 해당하는 지대가 형성될 것이고, 역사적으로 아픔을 간직하게 될 공간이 형성될 것이다. 제2항의 타결로 인하여 이러한 비무장지대의 윤곽이 들어나게 된 것이다.

〈그림 1-〉 유엔군 첫제의선과 잠정합의선

4 이어지는 협상, 그리고 가속되는 비무장지대 형성

합의의제 제3항(휴전감시)에 대한 논의는 11월 27일부터 곧바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휴전에 관한 장래의 보장과 전쟁 재발의 방지가 휴전감시체제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명시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었다. 여러 차례의 공방 끝에 양측은 12월 6일에 이르러 1휴전협정의 효력 발생 후 24시간 이내에 완전히 정전할 것. 일체의 무장부대는 72시간 이내에 비무장지대로부터 철수할 것. 쌍방이 지명한 소수위원으로 하여금 휴전군사위원회를 조직할 것' 등 세가지 점에서 합의에 이르렀다.

그리고 유엔 측은 시한부 휴전이 끝나고 51년의 연말이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도 전격적인 휴전성립의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으며, 이 때문에 51년 마지막 10일 동안 그들이 양보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을 내놓고 말았다. 유엔 측은 당초의 방침과는 달리 공산측에서 시한부 휴전을 당분간 더 연장하자는 잠정적인 제안에 동의, 군사적 압력을 계속 유보했고 북한 연안의 점령도서들로부터의 철수와 적 지역의 공중감시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1952년에 접어들면서도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51년 10월에 8만 명의 사상자를 냈던 공산군은 해가 바권 후 4월까지 매월 1만2천~ 1만3천명 선으로 사상자 수가 줄었다. 유엔군의 사상자도 매월 3천명을 밑돌아 개전 이래 가장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휴전회담의 진도는 암담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합의의 제 제3항 (휴전감시)과 제4할(포로교환)을 다루는 분과위원회와 참모장교회의가 번갈아가며 판문점의 천막 속에서 열려 수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양측은 눈에 띄는 진전은 이룩하지 못했다. 양측 대표들은 단순히 상대방의 의견을 반대하기 위해 만나는 것처럼 보였다. 휴전회담 개시 후의 두 번째 크리스마스는 아무런 희망의 서광도 비치지 않는 가운데 지나가고 53년의 새해가 다가왔다. 임진강 하구로부터 동부전선의 고지에 이르기까지 전선은 더욱 확대되고 전투는 치열해 갔다.

1953년 2월 19일 합동참모본부는 클라크 사령관에게 병상포로교환을 공산군 사령관에게 제안토록 지시하였으나 이러한 병상포로 교환제의에 대해 공산측은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1953년 3월 5일의 '스탈린 사망'으로 대화재개의 실마리는 풀리고 있었다. 세계는 스탈린 사후의 소련이 어떤 형태의 세계 질서를 추구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으며 이에 세계의 이목은 휴전회담이 결렬되고 있는 한반도에 집중되었다. 병상포로 교환을 위한 연락장교회의는 4월 6일 판문점에서 열렸다. 이달부터 연일 열린 회의에서 상대방의 제안과 설명에 반대하거나 항의하는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교환될 병상포로의 숫자가 확인되고 교환방법도 일사천리로 타결되었다. 이후 판문점에서 7일간 계속된 병상포로교환에서 유엔 측은 5.194명의 공산군과 446명의 민간인, 1,030의 중공군을 송환한데 반해 공산측은 국군 471명, 미군 149명을 비롯한 684명을 되돌려 보냈다.

4월 26일 양측은 6개월 8일 동안 중단되었던 본회의를 열고 휴전을 가로막는 마지막 문제인 포로교환'을 다시 협의하기 시작했다. 협의 결과, 송환반대포로의 즉각 석방을 포기하고 포로에 대한 3개월의 설득기간을 인정하는 중대한 양보를 하며 6월 8일 오후 2시 마침내 11장 26조의 포로교환협정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병상포로 교환협정이 조인되기 이틀전인 4월 9일 아이젠하워에게 과격한 내용으로 일관된 항의서한을 발송하였고, 휴전 조인시까지 계속된 미국에 대한 항쟁을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방위조약의 내용으로 유사시 미국의 즉각 개입. 한국에 대한 군수물자 보급, 미 해?공군의 계속 주둔 등을 열거하였으며, 아이젠하워는 이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는 서한을 보냈고 이승만 대통령은 11일만인 6월 17일 회신을 보냈다.

한편, 아이젠하워는 당초 이승만을 무마하기 위해 파견하려던 국무성 극담담당차관보 훨터 로버트슨을 항의 사절'로 서울에 급파하였다. '소휴전회담', 당시의 매스컴은 이때의 이?로버트슨 회담을 이렇게 부르고 있었다. 휴전성립의 성패가 판문점 회담보다 이 회담에 달려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미국뿐만 아니라 공산측도 이 회담의 추이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로버트슨과 회담한지 이틀만에 아이젠하워가 자신의 요구를 모두 수락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의 공약을 공고한 협정의 기초로 만들기 위해 그 내용을 문서화할 것을 요구하며 새로운 조건들을 추가. 무려 18일간을 소비했다.

5 비무장지대의 잉태

이승만은 요구조건 가운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단 한가지를 포기했다. 그것은 중공군의 한반도 철퇴와 북진통일이었다. 그 대신 휴전의 대가로 한미공동방위조약의 체결, 한국군의 20개 사단으로의 증강, 2억 달러의 장기원조, 1천만 파운드의 식량원조를 얻어냈다. '소휴전회담'의 결과, .... 양국 정부는 정치, 경제, 국방 등 광범한 협정에 관한 공동관심사를 논의했다. 특히 우리는 자유, 독립, 통일된 한국이라는 공동목표를 단시일내에 실현하기 위한 공동의 결의를 강조하고자 한다. "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7월 11일 막을 내렸다. 공산측 대표인 남일은 '우리는 이승만에 의해 석방된 2천 7백명의 포로가 재수용될 수 없다 하더라도 서명을 위한 준비에 착수할 것에 동의한다. 고 하였고 그 이유로 유엔군 사령부가 휴전 성립후 한국군이 침략행동을 취할 경우 휴전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로 했고 장비 및 보급을 포함한 원조를 제공치 않기로 했음'거듭 다짐하였다.

참모장교들은 공산군의 최후공세로 인하여 변경된 전선을 따라 군사분계선을 확정하였으며, 전조인은 7월 27일 거행키로 합의하였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세계의 시선은 다시 판문점에 쏠렸다. 3년여에 걸친 전쟁이. 또 2년여에 걸친 휴전회담이 종지부를 찍는 날을 맞은 것이다. 1백명이 넘는 보도진이 휴전회관 만팎을 에워싼 가운데 해리슨과 남일은 이 목조건물에 들어섰다. 그들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민사도 악수도 없이 각자의 자리에 앉았고, 쌍방이 마련한 18건의 정전협정 문서에 차례로 서명했다.

서명은 12분만에 모두 끝났고 해리슨과 남일은 문서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고 잠시 시선이 마주쳤으나 역시 목례조차 없이 돌아서 남북으로 난 출입문을 통해 말없이 퇴장하였다. 이로써 마지막 휴전회담인 제159차 본회의는 폐회사도 없이 막을 내렸다. 그러나 판문점 근처의 상공을 날아 북으로 출격하는 유엔군 폭격기의 굉음은 아직도 휴전이 시작되기 까지 12시간이 남아있음을 실감케 하였다. 유혈은 그쳤으나 대통령 이승만이나 유엔군사령관 클라크에게 이날은 유쾌한 날이 될 수는 없었다. 이승만은 끝내 이렇게 말했다. . 그러나 이제 정전이 조인되었음에 나는 정전의 결과에 대한 그동만의 나의 판단이 옳지 않았던 것이 되기를 바란다. " 그는 또 북한 동포들에게는 “동포며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북쪽의 무리 강토와 동포를 다시 찾고 구해내겠다는 민족의 기본 목표는 계속 남아있으며 결국 성취되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호소했다. 우여곡절 끝에 51년 7월 10일 시작이 된 159차례의 세계 최장기의 휴전회담은 2년여의 대화 끝에 53년 7월 27일 막을 내렸으며, 6.25전쟁은 마침내 끝나고 한반도는 승리도 없고 평화도 약속되지 않은 휴전이 시작되었고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양측이 남북 2km씩 불러남으로써 누구도 갈 수 없는 땅이 된 비무장지대는 비운의 첫 선민 38선을 대체하며 우리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림 1-〉 휴전회담 개시(1951년 7월) 당시 전선과 현 휴전선

QUICK
MENU